종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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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는 식물성 섬유를 나무에서 분리시킨 다음, 다시 이것을 물속에서 짓이겨 발이나 망으로
떠서 건조시킨 얇은 섬유조직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그 종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쓰임새도 다채롭다 종이를 갖지 못했던
선사 시대의 인류는 무덤이나 집터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후세에 전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인간은 의사 전달을 위해 증표나 기호, 문자를 만들었고 이를 점토판,
대나무, 목편(木片), 석판, 짐승가죽 등에 표시하여 후세에 전하였다.
바로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보다 많은 양의 정보를 편리하게 기록하고 남길 수 있는 재료를 탐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종이의 역사는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아즈텍인들은 종이 속에 심오한 세계가 깃들여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이는 신들을 달래는 의식(儀式)의 수단인 동시에, 통치자의 언행을 전파하고 기록하는 물질이였다. 중국인들도 종이를 악을 쫓는 부적의 상징으로 여겼으며, 종이를 태운 재를 허공에 날림으로써 사람의 영혼이 천상(天上)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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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종이는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였다. 기록지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창호지, 장판지 등으로 일상 생활에 널리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시신을 종이에 묶어 염을 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소지(燒紙)를 함으로써 죽은 자의 영원한 안식을 빌었다. 이렇듯 종이는 인간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발전을 거듭해 왔다. 즉 종이는 우리의 정신적 토양을 담는 그릇이였으며, 오랜 세월 동안 문화 전파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온 것이다. | ||
그 이전까지는 대나무나 나무 조각을 끈으로 묶은 간(簡)과 독(牘)을 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최근 전한 시대의 고분들이 발굴되면서 종이의 기원은 채륜의 발명보다 150~200년 정도 거슬로 올라가게 되었다. 당시의 종이는 마포(麻布), 마승(麻繩) 등 넝마를 원료로 하여 미숙한 초지 기술로 만들었다. 하지만 채륜은 필기가 용이하도록 개량함으로써 최초로 종이다운 종이를 만든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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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조지사화(造紙史話)>에는 백제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384년)가 제지 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중국 <송사(宋史)>는 신라에서 백무지, 우지, 학청지 같은
종이들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비록 제지술의 기원은 중국이었지만 이를 전세계로 전파시킨 것은 우리 민족이었다. 서기 610년 고구려
스님 담징은 일본에 처음 제지술을 전하였다. 그리고 서기 751~757년, 당나라 군사를 이끌던 고구려 출신의 장군 고선지는 이슬람군과
탈라스에서 전투를 벌이다 많은 부하들이 적의 포로로 잡혔다. 그 포로들은 사마르칸드로 잡혀가 그곳에서 제지기술을 전파하였다. 이후 사마르칸드의 제지 기술은 793년에 바그다드로, 960년에 이집트 카이로로, 1100년에 모로코로, 1151년에는 스페인으로, 1420~1470년에는 인도에까지 확산되었다. 이렇듯 중국의 제지 기술은 고선지 장군의 부하들에 의해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19세기를 기점으로 서양 문물이 수입되면서 중국 제지술은 더욱 정교한 기계와 새로운 원료의 형태로 변모되어 다시 동양으로 역수입 되었다. 일본에서는 1872년에 최초의 양지 제조 공장인 유우꼬오샤(有恒社)가 가동되었고, 이 기술이 우리나라에 전파되었다. 세계적 제지사가(製紙史家)인 다드 헌터(Dard Hunter)에 의하며, 우리 민족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지료 염색에 의한 색지를 만들었으며, 또한 종이 봉투를 만들어 사용한 첫번째 민족으로 되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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